본문 바로가기

박재희류 태평무

[인터뷰] <태평무> 출때는 시대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아래 포스팅은, Dance Magazine MOMM Vol.344 에 실린 인터뷰 전문입니다.(사진은 임의첨부하였습니다.)

 

 

태평무 명인이자 무형문화재 박재희 춤꾼

 

"〈태평무> 출 때는 시대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글_김남수 편집장

 

 

7월 21일 극한폭우 와중에 푸른 하늘 아래 몬드리안 호텔 근처 커피숍에서 박재희 춤꾼을 만났습니다. 온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박재희 선생님 은 먼저 도착해 계셨고, 얼굴 가득 미소 띠면서 반겨주셨습니다. 정식 인사를 처음 드렸고, 이런저런 안부를 여쭸습니다. 무엇보다 '박재희 춤인생 60년 기념'의 9월 공연 <춤 속의 사람 舞中人>을 앞두고 계신데, 감회를 들어봤습니다. 선생님은 한영숙류 태평무로 무형문화재가 되신 이후 새로운 기운으로 새로운 장을 모색하고 계신 듯했습니다. 차를 마시면서 인터뷰 본론으로 들어갔습니다.

 

김남수 박재희 선생님. 예전에 연대기식으로 인터뷰를 많이 하셨잖 아요. 그래서 괜찮으시면, 이번에는 쟁점식으로 인터뷰를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괜찮으세요?

박재희 네, 괜찮습니다. 어떤 식으로 할지는 모르겠지만.

 

김남수 질문 들어갑니다. 선생님 인터뷰 중에 한영숙 춤꾼이 선생 님한테 태평무를 처음 가르친다고 하시면서 가르쳤다는 말씀을 접 했어요. 그런데 처음 태평무 추실 때 한영숙 춤꾼의 발디딤새가 말 년에 한영숙 춤꾼의 그것과는 다소 달라졌다고 하셨어요. 속도라든가 동작이라든가. 그런 속에서도 선생님은 최초 배우실 때 익혔던 발디딤새 쪽을 선택하셨다는 흥미로운 말씀을 하셨는데, 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요.

 

박재희 디딤새 자체가 달라졌다기보다는 그러니까 제자들에 따라서 시기별로 아무래도 조금씩은 달라지시는 것 같아요.

 

김남수 그런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선생님은 후기보다는 초기의 오리지널을 따르고자 하셨다고 말씀하셨거든요. 그게 인상적이었어요.

 

박재희 네. 선생님이 처음 저한테 가르쳐 주실 때는 디딤새라든가 동작이라든가 이런 것이 빠 르고 다양한 그런 춤사위가 많았었는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빠른 동작은 좀 빠졌어요.

 

김남수  춤이 빨랐다는 것이 왜 그랬고, 그 후에 는 왜 다소 느려졌나요?

 

박재희 왜 그러냐 하면 선생님은 <살풀이>나 <승무> 같은 거는 꼭 생음악으로 하시잖아요. 근데 <태평무>는 생음악으로 안 하셨어요. 왜냐 하면 그 장단을 칠 수 있는 분이 그렇게 많이 안 계셨거든요. 옛날에는 한성준 선생님 계실 때는 반주단이 있었는데 이제 그분들이 작고하 시면서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그 장단을 제대로 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김남수  아 그래요?

 

박재희 그래 가지고 테이프 음악으로 하셨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음악은 고정이 돼 있는 상황에서 춤사위가 상대적으로 조금씩 느려지고 빠 른 동작들이 조금씩 빠지게 되었겠죠. 음악이 한정돼 있으니까요. 이런 과정 속에서 그 춤사 위가 조금씩 다른 곳이 있어요.

 

김남수  지금 다른 분들이 추시는 춤은 변한 상 태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겠군요. 그럼 좀 더 나아가서 한영숙제 박재희 춤은 다른 한영숙류 춤 을 추는 유파들과는 다소의 차이는 있겠네요?

 

박재희 예를 들어서 이렇게 손목 돌리는 동작 이라던가 이렇게 살짝살짝 뛰는 동작도 다른 분들은 안 하시지요. 맞다 틀리다의 문제가 아니 라 옛날에는 선생님께서 그런 동작을 가르쳐주 셨고 저는 배운 대로 추고 있지만 나중에는 선 생님께서도 안 뛰고 추셨지요.

 

김남수  그때 여쭤보지 않으셨어요? 선생님, 왜 안 뜨십니까라고

 

박재희선생님 작고하시고 나서 제가 본격적으 로 <태평무>를 추기 시작했어요. 그전에 1981 년 제1회 무용발표회 때 <태평무>할 때는 선생 님이 오셔서 보셨어요. 당시에는 선생님이 <태평무>를 많이 하시진 않으셨고, 1980년대 중반부터 많이 하셨다고 볼 수 있지요. 그때는 뛰시 지 않으셨어요. 그때는 제가 태평무를 배운지 10년 그 이후니까. 그런 질문을 던져볼 생각을 못한 거죠(웃음).

 

김남수  증언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재희 제가 사실은 정년퇴임 이후부터 <태평무>를 이론적으로 공부를 해왔어요. 그래서 나 름대로 정리를 해서 책으로 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제 거의 다 완성이 돼가고 있는데, 그 공 부를 쭉 하다 보니까 너무 아쉬운 거예요. 선생 님이 계시면 이것도 여쭤보고 저것도 여쭤볼 텐 데요. 그때는 춤만 배우고 춤만 생각을 했지요. 우리 한성준 선생님이 춤을 만드실 때의 그 시 대로 건너가서 공부를 해본다는 생각을 못한 거

에요.

 

김남수  다들 천년만년 옆에 계실 줄 알고 그런 거겠죠.

 

박재희 그러니까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에는 뭘 알아야지 질문을 하지 요? 그냥 선생님 가르쳐 주시는 대로 춤만 추었 지요. 지금처럼 공부를 했다 그러면 "선생님. 이 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저건 어떻게 되는 거예 요?" 이렇게 질문을 했겠죠. 선생님 대하기가 어려웠던 문제도 있었죠.

 

김남수  질문 잘하는 것이 철학의 능력이라는 말도 있더라고요. 하지만 지금은 박재희 선생님 내면에서 많은 질문들이 솟아나고 계신 것 같은 데요. 그리고 한영숙 선생님이 온화하시고 자애 로운 분으로 들었어요.

 

박재희 물론이죠. 여쭤보면 물론 답을 해 주시 고 그랬을 텐데, 그런 거 여쭤볼 생각을 못했어요.

 

김남수  기억나시는 말씀은 없으세요? 한영숙 선생님으로서는 선생님이 <태평무> 첫 번 가르친 제자니까 이런 점은 주의해서 춰야 한다거나.

 

박재희 아니, 그런 것은 아니고 이제 <태평무>는 너한테 처음으로 가르쳐 준다고 그렇게 말씀하 셨어요. 애주도 안 가르쳐줬고 재만이도 안 가 르쳐줬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다음엔 <태평무> 가 저한테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하셨죠.

 

김남수  <태평무> 만들 때, 한성준 선생님이 궁중 무용을 참조했다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박재희 음.. 궁중무용을 참조는 하셨겠죠. 근데 저는 그 궁중무용을 의식적으로 도입하고자 하 셨다고 생각은 안 해요. 그러니까 이 <태평무>가 궁중무용의 그런 절제미가 안에 포함되어 있고. 절제미뿐만 아니라 민속무용의 특징적인 흥이라든가 신명도 같이 들어가서 아주 적절하게 잘 녹아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의 작품 속에 서 우리 민족의 예술의 특성, 즉 궁중무용과 민 속무용 이 양쪽에 가장 중요한 그런 미적 요소 들을 다 포함하고 있으니까, 이게 얼마나 대단 한 춤이에요.

 

김남수  아, 멋진 정의이자 정리 같습니다. 궁중의 파인아트와 민속의 신명이 함께 어우러졌다. 일단 이름은 <태평무>니까 천하를 태명하게 만 드는 어떤 권능[權能]을 가진 춤 같습니다. 당장 떠오르는 게 군주나 조정 대신각료들 같은 지배층의 통치성 같은데, 거기에 민속무용의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한성준 옹은 조선말과 식민지 근대 시기 판소리 소리꾼들이 가장 선호하는 뛰어난 고수이자 근대 5명창의 음반 취입시 같이 활동했던 고수이 기도 합니다. 민요에서 생겨났다. 남도의 굿판 가락에서 생겨났다는 등 여러 가지 기원을 가 진 판소리 세계에서 약률과 신명 세계를 고수 로서 참여하고 만들어오신 한성준 옹이 나중에 조선 궁중에 들어갈 기회가 있어서 궁중무용 의 정통적인 미학을 접했다고 합니다. 그로부 터 차차 조선무용연구소를 개창하면서 1930년 대 본격적으로 한국무용의 새로운 장이 열 때 는 수많은 창작을 통해 전통을 재정비한 것으 로 유명합니다. 다만 〈태평무〉는 하늘과 땅 사 이를 교섭하는 왕도[王道]가 어떻게 보면 그 교 섭하는 민간의 힘[民力]으로 넘어가는 단계의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즉 왕과 같 은 군주만이 하늘과 땅 사이를 매개하는 유일 자였는데. 〈태평무〉라는 춤은 마치 민본주의, 나아가 민주주의의 전조처럼 그 매개하는 이들이 춤추는 백성일 수도 있음을 시사한 것이라고 할까요

 

 

박재희 저는 〈태평무〉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본질이 태평성대 같은 희구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 앞서서 한성준 선생이 〈태평무〉 만 드실 때의 시대적 상황으로 되돌아가볼 필요 가 있다고 봐요. 그때가 일제 강점기 시절이었 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 이 안녕하려면은 나라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야 된다는 그런 생각이 굉장히 강하셨던 것 같아요. (아, 독립과 광복의 염원 말인가요?) 그렇죠. 그 시대의 한성준 선생께서 같이 활동 하시던 강경수라는 분도 계시는데, 그런 예능인 들과 함께 기생들도 단순하게 산 것이 아니잖아 요.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참가했잖아요.

 

김남수 아, 처음 듣는 증언 같은 말씀인데, 너무 좋고 귀한 말씀 같습니다.

 

박재희 독립운동에 참가해가지고 기금도 내고 정말 거리로 나와서 만세도 불렀죠. 식민지 시기 기생들도 얼마나 많은 일들을 했어요? 강경수, 그분의 그런 삶을 이렇게 추적해 볼 때, 또 이 한성준 선생님의 삶의 궤적을 추적해 볼 때, 그 민족에 대한 사랑, 민족애[民族愛]가 대단하 고 애민 정신이 대단하신 분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어요. 알 수가 있어요

 

 

한성준 선생이 〈태평무〉 만드실 때의 시대적 상황으로 되돌아가볼 필요가 있다고 봐요. 그때가 일제 강점기 시절이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이 안녕하려면은 나라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야 된다는 그런 생각이 굉장히 강하셨던 것 같아요.

 

 

김남수 놀랍습니다. 아마 책에 쓰실 내용의 일부를 지금 말씀하신 것 같고, 책이 기대가 됩니 다. 또한 선생님 말씀 들으면 들을수록 약간 〈태평무〉는 왕의 춤처럼 생각이 드는데요. 민족애 와 애민 정신을 가지고 춘다는 말씀에서 특히.

 

박재희 네. 잘 짚으셨습니다. 태평무는 왕을 위 한 춤이 아니라 왕의 춤으로 격상하여 나라의 독립과 국태민안을 염원하는 국가적인 차원의 춤으로 승화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남수 박재희 선생님이 너무나 중요한 말씀을 하셨거든요. 한성준 선생님이 의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식민지 현실에서 어떤 정치적 무의식을 갖고 이런 창작을 통해 〈태평무〉를 창안하셨다 는 것이죠.

다시 정리를 해드리면 한성준 옹은 민족의식이 굉장히 아주 강하신 분입니다. 애민 사상도 강 하셨고 우리나라가 일제 침략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해야 된다는 생각도 아주 철저하게 가지 고 계셨을 거라는 거죠. 주위에서도 그런 운동 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함께 이제 동참하시 는 그런 신념도 갖고 계셨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태평무〉는 그러한 시대에 응전하는 과정에서 한성준 옹의 정신이 깊이 스며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박재희

〈태평무〉의 전신[前身]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왕의 춤〉에서는 무속무용의 영향을 많 이 받아 무속무용 내부에 내재되어 있는 특성을 선생님 당시에서 추시다가 그런 민족의식이 투영이 되면서 한성준 선생님은 옛부터 이어내려온 춤을 조금 더 확대하고 조금 재안무 해가 지고 하는 차원과는 다르게 주제의식을 가지고 추신 거에요.

 

김남수 지금 굉장히 많이 배웁니다. 직접 무형 문화재 선생님한테 들으니, 너무 실감납니다.

 

박재희 그렇잖아요? 옛날부터 각 지역별로 많이 춰오던 (살풀이춤) <승무> 같은 춤들이 있었잖아요, 그런 거를 선생님이 재정립하시고 체계 화시켰어요. 그렇지만 이 〈태평무〉는 〈왕의 춤〉 으로부터 새로운 시대의 춤이 된 것이죠.〈왕의 춤〉 안에 있던 무속무용의 어떤 것. 가령 설춤 이나 이런 걸 가지고 〈왕의 춤〉을 만드셨겠지만, 그 〈왕의 춤〉을 만드실 때는 무당이 추는 춤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만드신 거 아니에요? 기원 적으로 따져봤을 때. 이거는 이제 하나의 무속 영향권 안에 들어가 있는 춤인데. <태평무> 만드실 때는 이 〈왕의 춤〉의 내력을 갖다가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가 만드셨다는 뜻이에요. 이 단계가 뭐냐 하면은 거기에 민족의식과 주제의식이 들어가 있고 그 다음에 춤의 형식도 바뀌었 죠. 제목도 바뀌었고 장단도 찾아내어서 새롭게 〈태평무〉라는 춤을 만드셨습니다.

 

김남수 유교적 합리주의 국가에서도 왕의 역 할은 천인상감[天人相感], 즉 하늘과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느끼고 교감한다 라는 면이 있었죠. 지금으로 치면, 이상하게 보이지만 그 당 시에는 지극히 합리적인 세계관이었죠. 그러한 왕의 독점적인 권한이란 무당 중에서 국무[화 씨, 소위 나라무당격의 권능을 암시하는데, 역시 <태평무> 만드실 때는 그러한 사정과 내력들 을 다 살피신 셈이네요.

 

박재희 그렇죠. 그런 입장에서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인 단계로 볼 수 있는 주제의식을 가진 창작이에요. 그러니까 완전히 새롭게 하나의 작 품을 만드신 거예요. 다른 춤하고는 차원이 다 른 거죠. 그냥 그 의상을 왕이나 왕비로 이렇게 격상해가지고 한 게 아니라 정말 나라의 모든 염원과 기원을 나타내기 위해서 왕의 춤, 왕비 의 춤 등 이렇게 크게 하나의 국가적인 행사의 춤으로 격상시킨 거죠

 

김남수 어마어마한 일을 하셨는데요. 그러면서 도 그 왕의 권능을 만사람의 것으로 되돌려주 는 민본적인, 혹은 민주적인 일을 하셨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정치철학자 르포르가 말하기를, "광장에 떨어진 왕의 머리가 구르면서 그 왕의 모든 하늘 권력이 광장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이 된다" 라고 했습니다.

 

박재희 그러니까 저는요 <태평무>를 공부할수록 그런 힘이 너무나 대단하다고 느끼져요.

 

김남수 선생님 책이 빨리 출간되어야 할 것 같 습니다. 기대가 큽니다.

 

박재희 태평무에 대한 공부를 하나하나 해가면 서 너무 대단한 춤이라는 진실을 느끼고, 그 춤 을 이해하고 나서 춤을 추니까 달라지는 거예 요. 춤이, 그리고 제 마음가짐이요. 제 마음가짐 이 달라져서 추니까 보는 분들도 조금 다르게 느끼실 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김남수 마음의 문제가 있군요. 상감[相感]할 때 는 그 마음이 그릇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고 옛날부터 그랬죠. 귀한 말씀을 지금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박재희 걱정도 돼요. 선학들의 자료를 찾다 보 니 잘 못 되어있는 내용들도 있고, 많은 자료 가 있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제가 하나하나 하 다 보니까 그 안에 뭐 잘못이 있을 수도 있고 그렇잖아요. 이제 후학들이 그런 거를 보면서 거기에다가 연구를 더욱 축적시켜서 정말 <태평무>의 이해와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김남수 한영숙 선생님이 정본대로 가르치셨지 만 좀 다르게 출 수 있는 여지를 개방하셨다고 들었어요.

 

박재희 선생님은 똑같이 추는 그런 거는 별로강조 안 하셨어요. 그 사람한테 맞게끔, 그 사 람의 몸과 어떤 특수성이나 고유성 이런 걸 읽 어야지! 라고 하셨죠. 제가 해보니까, 그게 쉬운 게 아니더라고요. 웬만큼 제자들한테 관심과 애 정이 없으면 그게 불가능하더라고요.

 

김남수 그렇게 깊이 존재를 읽기 때문에 제자가 많지 않으신 것인가요?

 

박재희 네. 선생님 제자들이 많지가 않아요. 옛 날에는 5년에 2명씩 전수자를 뽑았으니까. 공부 할 때도 꼭 개인으로 공부를 했지, 다 모아서 공부를 안 했어요. 저희 때는. 그러니까 항상 혼자서 선생님하고 일 대 일로 배웠습니다. 이렇게 자세히 배우고 그러는 건 좋은데, 다른 제자들 하고 교류하기는 좀 어려웠죠. 저는 그걸 느꼈 거든요.

 

김남수 어떤 것을 느끼셨어요?

 

박재희 선생님은 선생님하고 똑같이 추는 게 박제화 되듯이 그렇게 추는 것보다는 그 사람의 특성에 맞게끔 추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하 신 분이죠. 옛날에는 판소리에 소위 말하는 '더 늠'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 사람의 즉흥성을 이 렇게 살려내는 거.

 

김남수 '더'을 일단 일정한 경지에 도달해서 스승의 인정을 받는 과정에 제자 나름 새로운 것을 넣은 거 아닌가요?

 

박재희 그렇죠. 그런데 선생님은 새로운 거를 넣고 이러는 것보다는 어쨌든 그 춤사위에서도 그 사람의 특성에 맞게끔 추구하기를 바라셨죠.

그러니까 뭐 춤이라는 게 똑같이 가르쳐도 사람마다 체격이라든가 성격이라든가 등등에 의 해 다르게 표출이 되는 거는 틀림이 없잖아요.

 

김남수 근데 선생님, 그 말씀을 거꾸로 뒤집으 면 다른 유파에서는 똑같이 가르친다는 뜻이잖 아요(웃음).

 

박재희 모르겠어요. 다른 유파는 저는 배워보지 를 않아가지고. 저는 어렸을 때 무용을 시작했 고 대학교에서 졸업하면서 바로 선생님한테 갔 잖아요. 그때부터는 선생님한테만 춤을 배웠어요. 그러기 때문에 뭐라고 해야 하나요? '순혈' 이라고 그래야 되나요(웃음). 저는 춤에 대한 어 떤 것뿐만이 아니라 성격적으로도 그래요. 모든 거를 막 넓혀서 하는 것은 부족하고, 좁더라도 깊이 파는 형이라고 생각해요.

 

김남수 선생님 표현에 중학교 고등학교 올라가 면서도 배우는 즉시 가르치면서 배웠다. 라는 재밌는 말씀을 하셨거든요.

 

박재희 지금도 가르치고 있지만, 제가 춤추는 것보다 가르친 게 더 많은 편이에요. 초등학교 2학년 때예요. 흥부 놀부라는 동요 있잖아요.

거기에다가 친구들을 데려다가 그 흥부 놀부에 맞춰가지고 제가 안무를 해가지고 가르쳤어요. 지금 생각하면 유희에 지나지 않겠지만...

 

김남수 초등학생이요?

 

박재희 네(웃음). 당시 저는 무용을 배워본 적도 없고 그냥 영상으로 무용 한번 접한 것뿐이었는 데.. 그걸 가르쳐서 이제 반대 장기자랑 한다 든가 학예회에 내보내고 했죠. 저는 제가 하지는 않았어요. 가르쳐서 걔네들을 내보냈지(웃음)

 

김남수 리더십 타고나신 것인가요? 안무가셨는 데요. 그리고.

 

박재희 중학교 1학년 때 춘천에 무용학원이 있었어요. 부모님이 반대하시니까 혼자 갔어요. 무용학원 선생님한테 무용을 배우기 시작을 했어요. 사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어린아이인데도 불구하고 혼자서 간 거예요. 반대를 뿌리치고 무용을 배우겠다고.

 

김남수 들으면 들을수록 신기합니다. 선생님. 타고나신 것이 확실하신 것 같네요. 그건 성격이 니까요.

 

박재희 부모님 반대에도 하여튼 전 무용하겠습 니다 하고는 간 거예요. 가서 이제 무용을 배우 니까 너무 좋잖아요. 이렇게 좋은 걸 혼자만 하 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당시에 제가 다닌 중학 교에는 무용반이 없었어요. 우리 학교는 무용반 이 없으니까 무용실도 없잖아요. 제가 무용반 만들고 무용할 사람 모아가지고 옥상에 올라가 서 가르쳤어요. 무용실이 없으니까 방과 후에는 옥상에 올라가서 연습시켰어요(웃음).

 

김남수 ...!

 

박재희 옛날에는 수도여고가 체조라든가 무용으로 굉장히 유명했죠. 그래서 그 학교로 유학 갔어요. 학교에서는 반대했어요. 선생님들이 니 가 뭐 무용을 계속 할 것도 아니고 왜 그러냐. 제가 무용을 해도 계속 무용을 할 거라고는 생각들을 안 하신 거예요.

 

김남수 결단력과 리더십이 장난 아니십니다. 이제 그런 것들이 뒷받침되어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셨죠?

 

박재희 청주대 교수로 삼십삼년 6개월을 재직 하고 있었으니까, 많이는 나왔지만 지금까지도 활동하는 그런 친구들은 몇십 명밖에 안돼요.

그런데 몇십 명이 있다는 것도 사실은 굉장히 감사한 거죠. 끝까지 무용을 놓지 않고 한다는 거는 쉬운 일이 아니니까. 아니 근데 하여튼 너 무 재밌는 게 지금 제자들이 50대 되고 그러니까 저를 그렇게 어려워하는 그런 거는 없어요. 옛날에는 사실 제자들이 굉장히 어려워했는데..

지금은 친구 같아요.

 

김남수 선생님,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50주년 때도 인터뷰를 하셨었더라고요. 조선일보 하고 도 하시고. 이제 9월 3일 공연 〈춤 속의 사람 舞中人>이 곧입니다. 춤인생 60년이라고 하면은 한 사람한테는 이렇게 크게 한 바퀴 돈 거거든 요. 우주의 이 순환 리듬에 따라서 정말 한 바 퀴를 돈 것인데. 선생님한테는 어떤 의미인가 요?

 

박재희 춤으로 60년이니까. 사실은 이게 감회 라든가 전체 삶과 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게 남 다를 수밖에 없거든요. 근데 이상해요. 이상한 게 이게 육십년 됐잖아요. 아무 생각이 안 나요.

(왜요?) 아무 생각이 안 나고 달라진 게 있다면 모든 것에 감사한 마음 그거예요. 너무 감사한 마음이에요. 저하고 이렇게 인연을 맺었던 모든 분들 그리고 제가 지금까지 정말 이렇게 무용 그 한 길만을 걸어올 수 있었던 이런 환경과 상황 뭐 이런 것에 대한 모든 것이 감사하고 정말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날 정도예요. 그냥 혼자 서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하곤 하는데, 이런 생각밖에 안 들어요. 그거 참 이상해요. 제가 생각해도 이상하고 진짜 춤 에 대한 뭐 이런 생각이 있을 것 같은데..

 

김남수 아니, 역설적으로 그럴 수 있다고 봅니 다. 엄청난 일을 당하면, 사람의 감정 체계가 미 처 대응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있죠. 그런데 그 감사한 마음은 선생님의 일생 살아오신 가운데 형성된 것 같습니다.

 

 

가족의 희생과 조력, 그리고 주위의 제자들, 박재희 선생님과 인연이 닿아서 함께 했던 모든 분들 서로간에 도움이라든가 이해라는가 하는 것이 없었다면. 박재희 선생님이 지금까지 무용 을 하기는 힘들지 않았나 라고 당신께서 스스로 회고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여건에서든지 제 재를 당할 수도 있고 중간에 못할 수도 있는 등 운이 좋은 편이었으며, 건강도 뒷받침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이제 70세가 넘게 되면서 눈과 귀 를 비롯해서 불편함이 생기고, 건강 문제를 많 이 신경쓰고 계신답니다. 그러면서 인터뷰 말미 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습니다.

 

 

김남수 한영숙제 박재희류 태평무가 무형문화 재가 되면서 동시대의 전통춤 중에서 아주 중요 한 축이 하나 된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강 선영 태평무가 한 시대를 풍미했기 때문에 태 평무 하면 으레 그렇게 인식했습니다. 선생님 은 예전 인터뷰에서 겸손하게 '나는 그냥 전통 춤꾼이오. 평탄하게 살아왔다" 라고만 말씀하셨 죠. 오늘 인터뷰 내용을 들으면서 반신반의합니 다. 유년기 때의 범상치 않았던 매력들, 창작에

대한 열망들이 있는 걸로 확인되는데, 이제 새 로운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전통 내지는 신전통이라고 강력한 구심력의 역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창작을 할 때는 원 심력적으로 튀어나가지만, 이제 집으로 돌아와 서 불멸의 성좌와도 같은 제자리를 찾아야 할 때는 전통이란 이름이 필요하지요.

 

박재희 전통은 우리민족의 삶의 숨결이자 우리 의 정체성이지요. 전통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 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쳐 면면히 이어 져 내려오는 우리 삶의 궤적이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전통춤도 오랜 기간을 우리 민족의 얼과 정서를 내포하여 우리 민족의 표현양식으로 추 어져오면서 그 춤의 정신과 테크닉이 모두 포함 되어 있는 그런 총체적인 가치,그것이 모든 사 람들한테 인지되고 인정이 되면서 발전된 것이 라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춤의 근본은 전통중에 있고, 전통춤은 우리 춤꾼들의 보루 이지요. 보통 전통춤이라고 한다면 100년의 시 간, 또는 3대 이상에 걸쳐 계보가 이루어지면서 이어져 내려오는 춤을 말합니다. 전통의 표현양식으로 많은 작품들이 새롭게 창 작되고 안무되는 것은 전말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신전통도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 각해요. 창작되는 그 시점에서부터 신전통이 아 니라 전통춤과 같은 긴 시간의 흐름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춤의 총체적인 가치가 많은 사람들 한테 인지되고 인정이 되어 많이 추어질 때 신 전통이라는 개념이 등재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 합니다.

 

김남수 선생님은 전통이란 개념과 신전통이란 개념을 분리하지는 않으시네요. 좋습니다. 선생 님. 그럼 지금 전통을 목표로 창작되는 어떤 방 법론을 신전통이라고 하는데, 한성준 선생님의 창작을 통한 전통은 어떻게 보세요?

 

박재희 한성준 선생님께서도 이 <태평무》를 만 들어서 처음 추실 때 이게 전통이다, 혹은 신전 통이다 이런 말씀을 하신 거는 아니죠. 저는 그 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시간 속에서 저절로 춤의 가치가 빛이 날 겁니다. 시간이 가면서 이 가치가, 모든 사람이 보존하고 전승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이 되어 꾸준히 지속적으로 추어질 때, 자연스럽게 전통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 각됩니다.

 

김남수  알겠습니다. 지금 신전통이라고 박차를 가하는 방식이 다소 빠르다고 보시는 듯합니다.

 

박재희 한국춤은 너무나 다양하고 그 종류도 많아서 분류하기가 쉽지 않지요. 우리의 춤을 분류를 하다 보니까 옛날부터 내려오던 춤은 전 통춤이라 부르고 전통춤의 표현 양식으로 새롭 게 안무한 것을 신전통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같아요. 분류를 하다 보니까 신전통이라는 얘기 가 나오는 거지, 애초에 만들어질 때 이거는 신 전통이다 라는 것은 조금 성급하지 않나 저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전통 춤과 같은 긴 시간은 아니더라도 그 춤의 총체 적인 가치가 많은 사람들한테 인지되고 인정이 되면서 널리 추어질 때 신전통이라는 용어를 사 용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김남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묵히는 시간과 하 염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춤은 비로소 가치 를 드러내는군요. 시간과 춤의 관계가 참 묘하 고도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영숙류 태평무 도 선생님이 일찍 시작하고 꾸준히 해왔기 때문 에 인정받으신 것으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박재희 한영숙 선생님의 위대한 발자취가 있었 기 때문에 오늘날 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될 수 있었지요. 어쨌든 꼭 뭘 하기 위해서 그랬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볼 수도 있었겠죠. 그런 것보 다는 그 춤 자체에 공을 들이고 그 춤 자체에 진심을 다해서 이렇게 전수 보급을 해오다 보 니까 모든 사람들이 〈태평무》를 인정 해주게 되 는 결과로 지금이 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 는 우리 제자들한테도 그 얘기는 많이 해요. 너 무 서두르지 말라고요. 그렇지만 게을리 해서는 안 되죠. 게으르지는 않으나 서두르지 않는 그 런 마음가짐으로 이렇게 자기의 진심을 다해서 정말 모든 정성을 다해서 춤에 임한다면 언젠 가는 그런 것이 다 돌아오지 않을까, 자기 자신 이 원하는 그런 위치에 자기가 한 발 다가가 있 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거든요.

 

김남수  알겠습니다. 이제는 박재희 선생님을 롤 모델로 할 겁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친구들이 선생님처럼 50년 기다려야 하나 보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거든요. 지금의

20대 30대 젊은 꾼들이 선생님의 이런 말씀 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지켜보도록 하겠구요. 이 제 한영숙류 춤을 하나로 모아서 춤보존회 차원 으로 큰 모임이 된 것은 시대의 요청 같습니다 만. 감회가 새로우신 것 같습니다. 기획 공연도 하셨죠? 작년인가요.

 

박재희 작년에 저희가 <태평무> 기획 공연을 그 렇게 한번 해봤어요. 춤을 짓다〉, 이런 타이틀 로 해가지고 맨 처음에는 〈태평무〉를 여러 명이 나와서 연습하는 과정, 그러니까 장단별로 이렇 게 나와서 추고 들어가서 앉아서 또 다른 친구 들이 하는 거 지켜보는 무대였어요. 2부에 가 서는 그거를 확장시켜가지고 <태평무>에 내재 된 정신과 의미를 살리면서, 예를 들면 뭐 발의 움직임이라든가 기원하는 태평무의 정신이라든 가 움직임을 확장시키는 시도를 했지요. 전승 회 회원들로 안무자 3명을 선정하고 그 안무자 가 몇 명씩 이렇게 선택해서 공연을 했어요. 마지막 3부에 원형 태평무로 해가지고 제가 춤을 췄죠. <태평무>라는 타이틀로 저는 기존의 기획 공연처럼 하는 것에서 탈피하려고 그렇게 했거 든요. 우리 춤을 더 성장시켜서 태평무 같으면 서도 태평무가 아닌, 태평무가 아닌 것 같으면 서도 태평무 같은 그런 어떤 춤들이 이렇게 다 시 나올 수가 있겠더라고요.

 

김남수  이번 공연은 어떤 시도를 하시나요?

 

박재희 이번에 60주년은 그렇게 하려고 그래 요. 영상이라든가 이런 것도 조금씩은 들어가 겠지만, 제가 오늘날 여기까지 한영숙 선생님의 춤을 이어받아서 하고 있잖아요. 또 한영숙 선 생님은 한성준 선생님의 춤을 이어받아서 저한 테 가르쳐주셨고 또 제 춤을 우리 제자들이 배 워서 이제는 자기들의 춤을 추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올해 60주년은 제가 한영숙 선생님께 받은 춤 중에서 이제 잊혀졌다가 다시 돌아온 춤을 제가 춰요. 선생님한테 받은 춤을 선생는 을 생각하면서 추고, 우리 제자들은 저한테 배 운 춤 중에서 어떤 특성을 뽑아가지고 춤을 만 들어서 또 저한테 헌정하는, 그런 형식이 될 거 에요. 춤이 춤으로 이렇게 이어지는, 그러니까 춤의 면면한 '이음'과 그 춤 속에서 만났던 사람 들과 그 인연들. 그들을 기억하며 춤으로 되돌려 드리는 회향(廻向)의 향연을 마련하고자 합 니다. 60년 동안 제가 받은 모든 감사함을 되돌 려서 관객 여러분과 모든 분들한테 보여드리는 그런 이미지로 하려고 해요. 많은 분들이 함께 공감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남수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정기공연이 있지 않습니까?

 

박재희 다음에 오는 것이 정기 공연, 즉 공개행 사인데, 그 <태평무> 공개 행사는 1년에 한 번씩하는 우리 의무거든요. 그것도 항상 하던 형식 이 아니라 우리 100여 명 전승회 회원들이 모 두 잔디밭에 나와서 태평무를 추려고 해요. 마 지막에는 관객들과 함께 태평무로 마무리 하려 고 합니다. <태평무>로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방안,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가지고 함께 즐길 수 있는 기획을 생각하고 있는데, 어떻게 될지 는 모르겠어요.

 

올해 60주년은 제가 한영숙 선생님께 받은 춤을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추고, 우리 제자들은 저한테 배운 춤 중에서 어떤 특성을 뽑아가지고 춤을 만들어서 또 저한테 헌정하는, 그런 형식이 될 거에요.

 

 

김남수  아닙니다. 잘 하실 것 같고요. 정말 지금 이 이제 재앙의 시대잖아요. 폭우와 폭염이 번갈 아 오고 오염수가 바다에 나간다고 하고 그런 재 앙의 시대인데, 이제 세상이 보다 낫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 염원과 마음이 <태평무>에 새롭 게 담길 것 같습니다. 시대에 보이지 않는 어떤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는 형식이 되는 것 같아요.

 

박재희 네. 예술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정 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처럼 힘든 시기에 관객 여러분과 함께 태평무를 통하 여 이 춤에 내재되어 있는 정신처럼 모두의 안녕과 마음의 정화를 느낄 수 있다면 참으로 기 쁠 것 같아요.

 

김남수  마지막으로 꼭 하셔야 되는데 못하신 말 씀이 있으면 해주세요.

 

박재희 저는 강릉 본가에서 태어났거든요. 우리 강릉집에는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방공호가 있었어요. 한국전쟁 터질 때, 그러니까 전쟁 나고 며칠 후에 제가 태어났어요. 그 고향 집에는 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방학이면 의례 껏 강릉 가요. 강릉 가면은 그 집이 사랑채. 안 채 그리고 행랑 이렇게 건너가면 저쪽으로는 사 당 있는데, 뒤는 대나무 숲이에요. 대나무 숲이 고 이 마당 이쪽으로 감나무, 밤나무가 너무 너 무 많이 있었죠. 앞에 개천이 흘러서 고기 잡고 맨날 오빠 쫓아다니면서 메뚜기 잡고. 그런 기 억이 선하게 나요. 겨울 되면 할머니가 홍시감 그걸 얼려서 이렇게 보내주세요. 강릉 하면, 저는 감나무부터 생각 해요. 옛날에는 저한테 감나무가 인상 깊었는데 제가 유년기를 보낸 춘천은 감나무가 없거든요. 날씨가 추워서 강릉 대관령 굽이굽이 내려가면 감나무 한 그루가 저 멀리서 보여요. 그러면 아이고! 이제 강릉에 다 왔구나.

 

김남수  유년기와 성장기 기억이 많이 나시는 듯 합니다. 감나무 한 그루로 강릉을 알아차리신다 는 회고도 무척 재미있습니다.

 

박재희 해변가에서는 할머니가 쪄주신 옥수수 먹으면서 놀고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죠. 그래 서 저희는 다른 데 여행을 많이 못 갔어요. 의 외로요. 방학이면 강릉만 가서요. 순박하게 그 냥 맨날 가서 물놀이하고 그랬죠.

 

김남수  오늘 너무 재미난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박재희 고향집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가 지 더 말씀드릴께요. 대나무에 대한 얘기를 들 었거든요. 대[C]가 갈리면 대나무가 죽는다고.

그러니까 대가 갈린다는 거 아시죠? 아버지대, 아들대 등등 이렇게 대[代]가 있잖아요. (이해했 습니다.) 그런 대가 바뀌면 대나무 숲이 죽는대 요. 그게 무슨 얘긴가 싶었는데 대나무도 수명 이 한 육십 년 정도 된다고 얼핏 들었어요. 설마 그랬어요.

근데 제가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 고향집 뒤가 대나무 밭이거든요. 여름이면 그냥 사랑채에 이 렇게 누워 있으면 대나무 소리. 그 바람에 흔들 리는 대바람 소리가 너무 좋았죠. 그런데 아버 지가 돌아가시니까 대나무가 싹 다 죽었어요 그러고 이제 오빠대가 됐잖아요. 대나무가 새로 나와 숲을 이루었어요. 그거를 실제로 경험했잖 아요. 그러니까 저는 그게 참 신기하고 오묘하더라고요.

 

김남수  인연조화의 운때가 맞아서 그럴 수도 있 지만, 선생님 말씀 중에 뭔가 멋있는 이미지와 운명의 이미지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또한

60년이라는 단위를 그렇게 대나무 이미지로 얘 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시간 인터뷰 감사 합니다.